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뤼순 공방전 (문단 편집) === 2차 총공세(1904.9.19 ~ 22) === 1차 총공세 후 일본군은 뤼순이 단기간의 돌격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공병을 활용, 다수의 공격용 [[참호]]를 파들어 접근하는 정석적인 장기 공성전으로 돌입하였고, 제3군과 다롄 사이를 철도로 잇고 후방에 다수의 군수품 창고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사전작업을 진행하면서 일본군은 예비병력과 보급을 기다렸고, 9월 초에 예비병력을 받아 1차 총공세에서 입었던 손실을 복구하였다. 또한 강력한 콘크리트 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280mm 포를 비롯해 다수의 포병세력 또한 지원받아 화력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제3군은 대본영의 공격 독촉을 받고 있었다. 제2태평양함대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대본영은 단기간의 맹공으로 조속히 뤼순을 공략할 것을 촉구하였고, 결국 노기 마레스케는 8월 31일에 재차 공세를 결정한다. 이를 통해 뤼순의 방어라인을 약화시켜 10월쯤에 계획된 3차 공세에 좀 더 쉽게 무너지게끔 하는 사전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 러시아군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차 총공세에서 파괴된 방어 시설들을 복구하였고 추가적인 철조망, 참호, 개인용 엄폐호를 구축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나타난 각 보루의 사각지대에는 지뢰를 매설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용 참호에 대응한 참호 건설이 진행되었다. 또한 해군 병기들을 육상 방어에 돌리면서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한 개량과 발명이 이루어졌고, 특히 일본군의 야전보루와 엄폐물을 파괴하기 위해 후대의 [[박격포]]와 비슷한 병기를 제작,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포격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모든 전선에 포병 지휘관을 임명하고 각 지휘관의 참모부를 신설하였다. 러시아군은 효과적인 포병의 운용을 통해 뤼순의 방어를 수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총공세가 있기 전 뤼순의 요새의 방어진지는 이러한 파괴된 시설의 복구, 해군 병사 및 해군 장비의 지원 등을 통해 1차 총공세 이전 수준까지 방어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2차 공세는 강력한 방어력을 보인 동부 전선을 피해 북, 서부지역을 주공격 지점으로 삼았다. 이는 1차 공격 때 동부방면의 러시아군 방어라인이 매우 견고하였다는 점을 인지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차 공격의 목표는 해서산(海鼠山)과 이령산이었다. 이 두 지역을 공격목표로 삼은 이유는 그곳의 방어력이 다른 곳에 비해 현저히 약했기 때문으로, 이때 해발 203m인 이령산은 이후의 악명에 걸맞지 않게 고작 기관총 4정과 대포 7문, 육군 3개 중대와 해군 1개 중대만이 주둔해 있는 작은 진지였다. 해서산 역시 이령산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19일 밤 시작된 2차 공세의 결과 20일 새벽, 해서산의 러시아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령산에 대한 공세는 신속하게 예비대를 투입한 러시아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또한 해서산의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일부 보루와 고지에서 러시아군이 같이 철수하였는데 일본군은 이 또한 접수하였다. 이후 이령산은 서북 지역의 최중요 방어거점으로 간주되어 집중적인 강화를 받았고, 그 결과 [[203고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해서산의 함락은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한 것이였다. 이 고지에서 일본군은 뤼순 내항의 대부분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내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전함에 대한 포격이 정확해졌다. 일본군은 이 교전에서 전사 924 명, 부상 3,925 명의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 군은 전사 600 명, 부상 2,200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이 공세가 제한된 목표를 노린 공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